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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43

무밭에 서서 - 최문자 깊은 산에 와서도 산보다 무밭에 서 있는 게 좋아 푸른 술 다 마시고도 흰 이빨 드러내지 않는 깊은 밤의 고요 그 목소리 없는 무청이 좋아 깨끗한 새벽 저 잎으로 문지르면 신음소리 내며 흘러내릴 것 같은 속살 밤마다 잎에다 달빛이 일 저질러놓고 달아나도 그때마다 흙속으로 하얗게 내려가는 무의 그 흰 몸이 좋아 땅속에 백지 한 장 감추고 있는 그 심성도 좋아 달빛이 놓고 간 편지 한 장 들고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 없는 미혼모 같은 배 불러오는 무청의 둥근 배가 좋아 무밭을 걷는 게 좋아 내 정강이 툭툭 건드릴 때 좋아 뽑으면 쑤욱 뽑힐 것 같은 철없는 그 사랑이 좋아 -무밭에 서서, 최문자 오늘 학교에서 생선가스가 나왔다. 마음에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반찬 투정을 잘 하지 않으나 계속 반복되어 .. 2023. 3. 28.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랑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항아리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일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듯한 달걀등을 거두어들이는 일.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프랑시스 잠 우리 학교는 농업을 중시한다. 설립 정신부터가 평민 교육을 담아낸 훌륭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 2023. 3. 27.
우리 사는 지구, 회복할 수 있을까? - 생태 시 모음 (2)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흙, 문정희 출처: 시집 『새떼.. 2023. 3. 20.
우리 아이라고 무사할까? - 생태에 관한 시 모음, 생태 시 모음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끝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공장지대, 최수호 출처: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 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골목에는..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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