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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43

버팀목에 대하여 - 복효근 (희생 시, 어버이 시) 버팀목에 대하여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 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기대어 산다는 것 기대어 산다는 것은 사뭇 씩씩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대는 것이 연약함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퍽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대어 산다는.. 2023. 4. 25.
고향 관련 시 모음(정지용, 백석)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醫員)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平安道 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故鄕)이란다 그러면 아.. 2023. 4. 17.
기형도 시 모음 (입 속의 검은 잎, 엄마 걱정)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 2023. 4. 12.
듣기, 이해인 (이해 시, 소통 시, 경청 시) 귀로 듣고 몸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전인적인 들음만이 사랑입니다 모든 불행은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모르지 않으면서 잘 듣지 않고 말만 많이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네요 아침에 일어나면 나에게 외칩니다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하루의 문을 닫는 한밤중에 나에게 외칩니다 들었니? 들었니? 들었니? -듣기, 이해인 오늘 나는 듣지 못하고 내 말만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음성에 여린 분노가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출근길을 배웅한다는 작은 설렘이 오늘은 무거움으로 내 저녁을 누르는 듯 느껴진다. 그만큼 통화기 너머로의 시간을 많이 쌓아왔는지, 오늘따라 그 빈 5분이 시리게 느껴지는 듯하다. 그 5분이라는 무거움 뒤 내 자리라는 듯 떳떳하게 미안함이 찾아왔다. 괜스레 비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가만 보..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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