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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기형도 시 모음 (입 속의 검은 잎, 엄마 걱정)

by 짙음새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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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랑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흔적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고요한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실존을 노래하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기형도의 원체험은 가난이었다고 한다.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뇌졸중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온 가족들은 돈을 벌기 위해 주야로 일해야 했고,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엄마 걱정'이라는 시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여실히 살필 수 있다. 가난은 그의 어머니를 밤이 되도록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의 어린 시절이 '빈방'과 '어두움'으로 채워질 때, 그의 시 세계도 조금씩 검은색으로 칠해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는 똑똑했다. 중,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늘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는 듯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요즈음은 온통 불명확한 것 투성이다. 나의 생, 혹은 문학, 진로, 학업, 관계, 미래, 시간, 공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는 삶이란 불가해한 것으로 망설임을 잔뜩 안기어주는 것이었다. 그가 마주한 군상들은 그 자체로 의문들이었을 것이다. 그가 감내해 왔던 시절은 실존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충분했던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시위와 폭력으로 얼룩진 현대를 지나온 그에게 인간 존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 수많은 시인들이 민주화를 위해 다투어 시를 썼다. 대표적으로 황지우, 이성부라는 시인이 있겠다. 그러나 기형도는 이 시인들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풍긴다. 비평가 김현이 '비극적 세계 인식'이라는 표현을 하며 기형도의 시 세계를 평한 바가 있듯이 말이다. 기형도의 시는 '유토피아에의 간절한 열망과 그것을 배반하는, 이미 참담하게 파탄이 나버린 악몽의 현실 사이에서 찢긴 자아의 세계(장석주)'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현실은 '참담', '파탄'나 버린 공간이다. 기형도는 그러한 파탄난 현실을 거짓 없이 그대로 표현한다. 서성거림과 혼란, 탄식을 담은 황폐한 내면은 그가 거쳐온 인간들의 죄악을 그대로 그려낸다.

 그의 시가 성실하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내면을 통해 전달되는 시인의 마음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장석주는 그의 시에 대해 '오래 망설이며, 회의하고, 그것을 내면화하여, 마침내 인간 삶의 보편적 명제인 실존의 부조리성과 무의미성을 이끌어낸다'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를 돌이키며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고 표현한다. 이는 고통과 번민으로 둘러싸인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며, 그 자체를 온전히 감내해 나가는 개인으로서의 우직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피하지 않고 고통을 그 자체로 내면화한다. 이는 그 자체로 이파리를 토해내는 생명력 가득한 행위라 하겠다.

 

비극을 감내한다는 것

 비극을 비극으로서 마주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죽음, 번민, 고통의 가치를 역설하는 실존주의 철학 사조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비극을 비극으로, 좌절을 좌절로, 실패를 실패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도피의 사회이다. 그리고 곳곳에 도피할 공간을 마련해두고 있다. 그 공간은 실재하는 공간을 넘어선다. 가상의 공간으로도 확장되어,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그 공간을 유영하며 하루하루를 합리라는 굴레로 매듭짓지 못하고 나아간다. 그들에게 비극을 초래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청년들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맑은 눈으로 세상에 곧은 가래침 한번 뱉어보지 못하는 것일까?

 '표백'이라는 책에서는 구조가 지닌 힘에 대해 언급한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개인이 책임이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합리화한다고 말이다. 우리 나라의 자살률은 OECD 1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은 아직도 '부적응'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개인의 희생이 이렇듯 딱지 붙음은 청년들의 목구멍을 타고 오는 날 선 원망을 찍어 누른다. 

 나도 그런 딱지가 불안해, 대학 생활이 늘상 착실했다. 등록금이 높다느니, 혹은 취업이 안 된다는 담론에는 내 목소리가 조금도 담기지 못했다. 오히려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학점 0.1이라도 어찌 올려야 하나 궁리하는 '검은 잎'과도 같은 삶이었다. 그렇게 내 맑고 더운 내면을 내려놓고 흐리고 식은 심장으로 사회의 각질처럼 부유했다. 나는 괴로운 현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삶을 지내온 것이다.

 이제는 비극에 한껏 흔들려 보고 싶다. 초라한 현실, 흐리고 뭉뚝한 미래를 똑바로 마주하고 이파리를 틔어보련다. 내게 재갈 물리던 어색한 딱지들을 벗어던지고서. 서로의 혐오가 늘어나고, 나라 간에는 자국의 이익을 다투느라 바쁘며, 약자들에 대한 괄시가 만연한 현실은 벗겨낼 실오라기조차 없어 초라하다. 초라한 비극들을 마주하려면 용기가 필요할 일이지 않나. 한 청춘 넉넉히 비극으로의 응시가 될 일이지 않은가.

 

 

 

침묵, 이해인 (언어 시, 사랑 시)

침묵 이해인 진정한 사랑의 말이 아닌 모든 말들은 뜻밖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많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말을 거듭할수록 명쾌한 해결보다는 더 답답하게 얽힐 때가 많음을 본다 소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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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시 모음 (문태준, 이해인, 이수복)

산에는 고사리 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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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되어 새가 되어 - 나태주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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