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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봄비 시 모음 (2) (함민복, 도종환, 정호승)

by 짙음새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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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 봄비, 정호승

- 《시평》 2010년 여름호

 

슬몃 내리는 비

반가워 양철지붕이 소리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약속을 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가장 그리운 사람이라고

내리는 봄비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씨앗은 단단해졌다

언 입 풀려 수다수러워진 양철지붕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온몸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 봄비, 함민복

- 함민복 산문집 <미안한 마음>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 돌아가는 꽃, 도종환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봄비를 맞는 꽃들과 나무들, 생명들을 보면서 나를 쫓아다니던 상념들도 씻기어 가는 듯하다. 칼국수를 먹으러 나갔다. 콩칼국수집을 가려고 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다른 곳으로 또 이동했다. 30분 정도 달려 다른 칼국수 집에 도착했다. 그곳도 손님들이 붐볐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 오는 날만 되면 칼국수 집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자리에 앉아서 칼국수를 먹고 있으니, 그 이유를 알겠다. 문득 온정이 그리워지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봄비가 내리는 시간은 왜 온정이 그리운 시간이 되는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이야기한다면 봄비와 함께 하는 것들이 따듯함과는 썩 거리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봄은 생명의 계절이지만 소멸의 계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조년이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시조에서 읊은 심정이 이해가 된다.

 봄만도 여러 해인데, 매년 봄에는 느끼는 감정이 그토록 비슷한지 모르겠다. 정호승의 시에서 심은 씨앗은 내년에 다시금 피어오르는 꽃이 될 것인가? 봄비가 씨앗을 생명력으로 틔워줄 것인가. 상처를 받고 심는 씨앗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썩은 가슴을 위한 화자의 노력은 고요하고도 서글프다. 꽃씨가 피어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꽃씨를 찾아가는 것만큼 애절한 사랑이 있을까. 꽃씨가 잘 있나 찾으려는 화자의 마음을 봄비가 진정시킨다.

 한 6년 전이었나. 친구들과 함께 벚꽃 구경을 하러 하동에 갔던 적이 있었다. 함께 도시락을 싸와 벚나무 아래서 도란도란 나누어 먹었다. 그때 마침 비가 내렸다. 터미널로 돌아가는 길은 섬진강 따라 10리 길 정도 되는 긴 길이었다. 택시도 없고, 길도 막혀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한 민가 처마에 옹기종기 모여 비를 피했다. 고라니 눈을 하고 바라본 처마 끝의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때 처마 있는 집의 주인이 나와 잠시 머물다 가라고 했다. 생쥐꼴 마냥 우리는 집주인아저씨가 제공한 허름한 방에서 모여 의논을 나누었다. '집을 어떻게 갈 것인가'하고 말이다. 저녁 7시쯤 되었을 때 다행히 비가 그치고 우리는 천천히 걸어 터미널로 도착했다. 봄날의 꿈같은 날이었다.

 '꽃피는 것 보면 알지 /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그 시간이 아직 내게 남아있는가 보다. 그래서 봄비가 내리면 기억이 얼굴과 함께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씨앗 같은 약속들을 했었다. 씨앗같은 약속들이 내 삶으로 전이되어 가는 것이 신기하다. 봄꽃들은 약속으로 피어나는데, 나의 약속은 아직 피지 못한 상태로 썩어버렸음에 더욱이 봄날이 아프게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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