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바닷가에서, 오세영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도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 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혼령(魂靈)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겨울 바다, 김남조
한 학생이 바다를 주제로 글을 썼다. 하도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글을 보고서 설레는 감정이 든다는 것이 참 반갑다. 그 학생의 글이 계속 떠오른다. 그 학생은 이태준의 무서록을 인용하며 바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시작한다. 긴 글도 아니었다. 짤막하고 아기자기한 글씨로 힘 있게 바다를 응시하는 글을 적었다. 그 학생은 바다라는 말 자체가 바다를 너무나도 잘 나타낸다고 했다. 바다에 들어간 '아'라는 모음부터가 왠지 모르게 바다와 어울리는 색채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바다를 길게 늘여 말하면 '아' 음이 쭉 하고 뻗어 나온다. 바다가 바다가 된 이유는 음색 하나하나에도 나타나있는 것이다.
몇 달 전인가. 사랑어린학교에서 두더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늘과 같은 사람, 바다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바다는 더러운 물, 깨끗한 물을 가리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며 불평하지 않고, 바다가 된다. 인간의 가장 선한 모습은 어쩌면 자연에 있는 듯하다. 자연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 삶의 양상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노자는 이를 상선약수라고도 했다. 물에 가장 아름다운 '선'이 들어있다고 말이다. 물은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한다.
아름다움과 선함의 경계는 늘 모호하다. 선을 행하는 이들을 보면서 경탄을 하는 것은 그것이 아름다움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의 아름다움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다는 변화하지만, 그 속은 깊고도 고요하다. 세상의 움직임에 파도로 귀 기울이지만, 그 속에선 깊은 어둠을 삼키며 내면을 끝없이 넓혀나간다. 세상의 더러운 이야기, 아리고 쓸쓸한 이야기마저 그 깊은 내면에 이르면 잠잠하게 양분이 되어 생명이 된다. '인고(忍苦)의 물이 / 수심(水深)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라 말하는 김남조도 바다의 이러한 속성을 알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라는 구절은 바다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바다가 평안할 수 있는 것은 대립하지 않는 겸손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서로 구별 짓고 편 가르기 바쁘다. 조금 더 나아 보이려는 생각. 세상에서 좋고 나쁨은 누가 규정짓는 것일까? 바다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얕고 좁은 존재인지를 반성하게 한다. 그 이유 없는 수용은 바다가 바다일 수 있게 만든다. 바다가 되고 싶다.
바다는 생명력을 가득 길러 우리에게 양분을 주지만, 하루 아침에 우리의 생명을 포악하게 앗아가기도 한다며 학생이 글을 썼다. 또 거친 파도를 하얗게 토해내면서도, 그 속은 깊고 고요하며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다를 통해 다양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 그 학생의 눈이 참 부럽다. 그 맑은 눈이 쓴 맑은 글을 읽노라니 청년이 되어 다시금 힘찬 나날을 계획하게 된 듯하다. 어쩌면 내가 학생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음 속 깊이 푸른 이야기들이 고요하게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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