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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봄비 시 모음 (문태준, 이해인, 이수복)

by 짙음새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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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고사리 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봄비 맞는 두릅나무, 문태준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풀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입안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봄비, 이수복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힌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봄비, 이해인

 

 봄비를 띄어 써야 하나 붙여 써야 하나 망설였다. 곧장 검색해 보니 봄비는 하나의 단어였다. 그러고 문득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다른 계절도 붙여 쓰는가 하고 말이다.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모두가 하나의 단어다. 장맛비, 달구비, 장대비 비는 그 이름도 많다. 비가 이토록 많은 이름을 가진 것은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에스키모인들은 눈의 종류를 수십 가지의 언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도 함박눈, 싸라기눈, 도둑눈 등 다양한 눈이 있기로서니, 에스키모인의 섬세함에 따라가지 못한다. 차이를 찾아내는 것은 섬세함이고, 섬세함은 삶 속에 깊이 녹아들었을 때 길러진다. 에스키모인들에게 눈을 빼놓고 주거를 생각할 수 없듯,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비를 빼놓고선 먹거리를 말할 수 없다. 비는 삶을 길러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비는 생명이요, 애틋한 사랑이다.

 예전에 비를 가지고 시를 쓴 적이 있다. 다른 계절의 비와 다르게 봄비는 애틋하고 여린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봄비가 내리는 계절이면 창문을 타고 삼삼오오 커져가는 물방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봄비 내리는 풍경으로 거니는 사람들도 내게는 고요한 떨림이 되었다. 봄비가 떨림을 주는 것은 생명력 때문이다. 봄비의 생명력은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에서 처럼 순수하고 당차다. 이러한 생명력은 그 자체로 공명하며 떨림을 준다. 여리고 다정한 사람이 내 곁을 맴돌 때, 나도 함께 여리게 진동하는 것이 생명력의 공명을 보여준다. 이런 봄비는 기억에도 생명력을 준다. 시들어가는 기억도 봄비를 맞는 순간, 갈라진 자국 사이로 진갈색 진흙을 퍼올린다. 얽힌 기억들이 생명력을 얻고 피어오르는 것을 시로 적어봤던 것이다.

 비가 내린 웅덩이에 사람들 발이 닿을 때, 씻겨진 기억들이 흡수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봄비가 내리는 날만 되면 그토록 과거가 힘을 발휘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봄비가 내린다. 내 과거가 비와 함께 촉촉하게 살아난다. 대학교 시절 나는 참으로 어렸다.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받은 폭력보다, 정신적으로 받은 폭력을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 나는 언어의 힘을 모르고 얼마나 무수한 이들을 멍들게 했던가. 내가 잘난 줄 알고, 내가 중심인 줄 알고 얼마나 오만을 떨었던가. 봄비 앞에서 되살아난 기억이 마음을 씻어낸다. 봄비는 오만과 다툼, 자랑과 시기로 뒤덮인 시꺼먼 내 가슴을 씻어 그 깊숙이 숨겨져 있던 부끄러움을 닦아 보인다. 

 맹자는 부끄러움이 인간됨의 근본이라 했다. 근본 없이 살아온 세월은 그토록 길게 내 삶에 남아서 봄비가 내리는 날만 되면 인간다운 나를 만들어 낸다. '진달래 꽃망울처럼 /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 말없이 터뜨리며 / 나에게 오렴' 봄은 적어도 내겐 부끄러움의 계절이다. 그 부끄러움은 묘하게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이라는 후회가 그리움의 형태로 함께 피어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간다면 잘하겠다'라는 마음과 함께 다시금 피어나는 봄이 나를 부끄럽게 적시는 날이다.

 봄비는 내일까지 주욱 올 거라고 한다. 최근 산불이 크게 나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스럽다. 기후위기로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 산불 발생률도 전년 대비 20%가량 높아졌다고 한다. 욕지도라는 섬에는 저수지 물이 말라서 목욕탕의 물도 채워 넣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연이 우리를 꾸짖고 있음에도 나를 포함한 인류가 꼿꼿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봄비가 알려주는 부끄러움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제 봄비는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의 시구처럼 생명력만 담아내는 존재를 넘어서야 한다.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에서처럼 서러움으로. 한 없는 부끄러움을 담아낸 서러움으로 짙어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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