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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고향 관련 시 모음(정지용, 백석)

by 짙음새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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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醫員)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平安道 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故鄕)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 아느냐 한즉
의원(醫員)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醫員)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홀로 변한다는 것

 돌아보니 내겐 늘 어두운 옛 일들이 열을 지어 뒤따랐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높은 언성과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방안 그득했다. IMF가 터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장을 잃었고, 우리는 반지하로 이사를 했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생각'이라는 시에서 화자의 모습이 선뜻 스친다. 내 유년의 모습은 늘 누군가를 위한 기다림으로 채워졌었기 때문이다. 그 유년의 시절의 그 헛헛함은 언제나 채워지지 못한 채로 늘 나를 과거로 불러들였다. 채워지지 못한 과거는 무거운 질량이 되어, 현재의 나를 끌어들이는 자력을 갖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었다. 군을 제대하고 문득 내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제대와 함께 홀가분해진 자유로운 마음이 과거로 빨려 들었던 것이다. 그냥 끌리어 간 곳에는 너무도 변함없는 내 어릴 적 공간이 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빌라에서 살았다. 빌라 근처에는 버스 기사님들이 간이 터미널이 있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기름을 넣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림에 일 푼이나마 보태어 주셨던 걸로 기억이 난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 길목은 새롭게 페인트를 칠하긴 했지만, 건물들은 옛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계속해서 나는 내가 살던 곳, 옥성 빌라로 갔다. 

 어린 날의 나에게 옥성빌라는 아득하게만 느껴졌었다. 내가 다녔던 포천 초등학교에서 나서 옥성 빌라로 향하는 길은 어린이 걸음으로 30분은 부지런히 올라야 도착할 수 있는 꽤나 먼 거리였다. 그 여린 어깨와 작은 발로 다져놓은 그 길 따라 내 마음도 나 있는 듯했다. 비지땀을 흘려가며 올라간 어린 날의 나는 어느 곳으로 사라지지 않고, 그 공간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를 불러들인 것도 그날의 발자국이지 않았나 싶다. 그곳도 큰 변화가 없었다. 5학년 형에게 '축구(바보)'라고 했다가 혼쭐이 났었던 곳인 주차장과 계절 타고 날아온 하늘소가 머물던 방범창도, 나지막했던 계단과 구리색의 낡은 출입문도 그대로라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변하지 않은 것들 틈 사이에, 나는 홀로 변해왔다. 홀로 변하는 감정은 외로움을 키운다. 정지용의 시 '고향'에서 고향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우'는 공간이다. 그러나 화자가 느끼는 감정은 '쓰디쓰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마음을 느끼게 했을까? 그것은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에서 살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서 '화자'는 홀로다. 변화한 자아로서, 과거의 모습과 동화되지 못한 채 마음이 떠돌고 있다. 어쩌면 고향의 본모습은 과거의 모습과 화해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변하지 않은 그 공간에서 홀로 됨을 느꼈다. 그 홀로 됨은 나를 끈질기게 쫓아오던 과거가 지금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지 싶기도 했다. 그 과거의 나는 변화하지 않은 채 공간 속에 묻어있었지만, 나는 그 공간에 스며들지 못했다. 큰다는 것은 이처럼 쓸쓸한 일이다. 정지용이 느낀 쓸쓸함은 같은 쓸쓸함의 연장이라 생각이 든다.

 

 

고향으로 난 마음 길

그럼에도 나는 과거를 향해 마음이 뻗어간다. 그 길 끝에 놓인 쓸쓸함의 존재를 알면서도, 화해하지 못한 어린 나의 모습이 남아있음을 느끼면서도. 그러나 나는 슬픔을 만질수록, 기쁨만큼이나 따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잘나기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나는 못난 시절의 나를 향해 마음길이 난다.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리며 해가 정글짐에 내려앉기까지 학교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초라한 어린 날을 향해 난 길은 어두운 듯, 고요히 따스함을 뿜어낸다.

 백석의 고향에서도 따스함이 한가득 묻어난다. 그에게 동향이라는 '의원'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과 따스함이 된다.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은 과거를 거름으로 자라는 것이기에, 고향에 묻어있는 것은 나 이상의 것이 아닐 테다. 나의 시간들이 모여, 그 공간을 덧칠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아직 치유되지 못한 날의 나는 지금을 함께 앓으며 살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투사라는 용어가 있다. 투사는 자기 합리화인데, 누군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작동되는 심리 기제다. 투사는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이시켜 합리화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본인이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나도 미워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내 감정을 타인에게 전이시켜서 느끼는 것이 되겠다. 고향을 떠올리면 '과거의 나'가 내재해 있다. 이러한 속성으로 사뭇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의사가 조언하는 30가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고향 가보기'가 목록에 있었는데, 이는 다른 말로 과거 나를 돌보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 싶다. 고향에서 만난 것은 어린 시절의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퇴적된 존재라 생각한다. 모든 순간들이 나의 일부가 되어 함께 이 순간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과거로부터 도피하고 새로이 시작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과거의 우울과 고독을 벗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깨져가는 나를 돌보지 않은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문득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나로 태어나겠느냐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물론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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