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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무밭에 서서 - 최문자

by 짙음새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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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에 와서도 산보다

무밭에 서 있는 게 좋아

푸른 술 다 마시고도 흰 이빨 드러내지 않는

깊은 밤의 고요

그 목소리 없는 무청이 좋아

깨끗한 새벽

저 잎으로 문지르면

신음소리 내며 흘러내릴 것 같은 속살

밤마다 잎에다 달빛이 일 저질러놓고 달아나도

그때마다 흙속으로 하얗게 내려가는

무의 그 흰 몸이 좋아

땅속에 백지 한 장 감추고 있는 그 심성도 좋아

달빛이 놓고 간 편지 한 장 들고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 없는 미혼모 같은

배 불러오는 무청의 둥근 배가 좋아

무밭을 걷는 게 좋아

내 정강이 툭툭 건드릴 때 좋아

뽑으면 쑤욱 뽑힐 것 같은

철없는 그 사랑이 좋아

-무밭에 서서, 최문자

 

 오늘 학교에서 생선가스가 나왔다. 마음에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반찬 투정을 잘 하지 않으나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반찬이 오늘따라 괴롭게 느껴졌다. 며칠 전에 나왔던 것 같은 생선가스인데, 또 만나니까 이제는 그 단조로움에 감정이 터져 나왔다. 식단에 대한 원망은 자연스레 영양사 선생님에게로 날아갔다. 도대체 식단 연구를 하는 건지라는 생각에서부터 못돼 먹은 생각들이 피어오르며 미움이 번져갔다. 그러다 한 선생님께 그 이야기를 드렸더니, '앞에서 하지 못하는 말은 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셨다. 그 순간 참 많은 것들을 뉘우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갑갑한 메뉴였지만, 앞에서 하지 못하는 말을 뒤에서 하는 행동은 나 자신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는 행위이지 싶다.

 어제는 참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자아실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담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내가 이렇게 향기로운 말들을 몸소 지키며 살고 있는지를 돌이켜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늘 그런 딜레마 아닌 딜레마에 놓여 괴로운 시간들을 지금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10년 정도 여러분보다 더 살아서, 세월을 담은 조언을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들이 많다고 말이다. 다만 정성을 담아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겠다는 다짐 정도는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박완서, 권정생 선생님 같은 분들을 보면 그들의 말에서 향기가 난다. 말을 많이 부연하려고 하지 않아도 삶이 숙성시켜 준 언어가 우리들에게 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영글어 가는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아직은 부끄럽게 그 속살을 채워가고 있지만 말이다.

 이 시에 나타난 무를 보면 나도 화자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푸른 술 다 마시고도 흰 이빨 드러내지 않는' 무는 아마 세상살이에 대한 깊이가 채워진 어른 같은 느낌이 든다. '달빛이 일 저질러놓고 달아나'더라도 무는 화내지 않는다. 이러한 외적인 자극에 화내며 그 머리를 곧게 세우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안으로 하얗게 순수한 내면을 채워간다. 나처럼 식단이 나쁘다며 누군가를 욕해보려는 못된 마음의 뿌리를 뻗지 않는다. 자극을 자양분 삼아 순수함을 키워낼 뿐이다. 외부에 원망을 하지 않고 그저 유연하게 성장할 뿐이다. 

 무는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 없는 미혼모'처럼 단지 달빛을 믿어준다. 그리고 믿음으로 배를 둥글게 만들어 간다. 영리하게 머리 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믿어주는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온전히 믿으며 그 사람의 성장을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면 나는 무 하나만큼도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지 않을까? 둥글게, 그리고 희게 성장하지 못하고 모나고, 그리고 어둡게 살아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나도 언젠가는 '뽑으면 쑤욱 뽑힐 것 같은 / 철없는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며 살아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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