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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첫 마음, 박노해

by 짙음새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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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 마음으로

-첫 마음, 박노해

 

첫 마음

 연말이다. 창밖에는 눈이 가볍게 내리고 있다. 나무 등허리에는 햇살이 내린다. 햇살과 눈이 만들어낸 눈부심이 오늘을 밝고 기운차게 해 준다. 연말이 되어 나는 올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본다. 올해는 새 학교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나의 한 해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시간이었지 싶다. 사람을 배울 수 있어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알찼다. 사람과 함께 하는 모든 과정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 동료 선생님들과의 수다, 학교 동아리에서의 축구.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을 다채롭게 해 준다. 내 삶을 가장 다채롭게 바꾸어준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애인이지 싶다.

 그녀는 내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들에게 학문과 꿈, 열정을 가르치면서 내게 던져보지 못했던 질문이라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것을 찬찬히 돌아보며 생각하는 순간 내 삶을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삶은 '해야 할 것'에 대해 집중한 삶이었다. 하고픈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내 삶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책 읽기', '예당호에서 모노레일 타기', '독립 서점에서 책 사기', '부산에서 회 먹기' , '글램핑 하며 바비큐 파티' 등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짜를 잡아갔다. 내 달력이 하나씩 하고자 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너는 연말이 좋아? 연초가 좋아?"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연말이 좋다고 대답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그 시간을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것만큼 풍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초가 좋다고 했다. 연초에 다져나가는 첫 마음을 사랑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연초에 처음 듣는 노래가 그 한 해를 나타낼 수 있다며, 나와 함께 노래를 정해서 듣자고 했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명준은 북한과 남한을 오가며 중립국을 향해 떠난다. 타고르호에서 그가 중립국을 향해 떠나며 떠올린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대학교 강의를 들을 때 한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새로움에 대한 동경. 교수님은 누구나 새로운 시작에 대한 동경을 품 안에 갖고 살아간다고 하셨다. 새로움에는 희망이 있고, 새로움에는 설렘이 있다. 새로움은 기회다. 

 마음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매일매일 기회에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새로움으로 얻어지는 희망의 하루하루가 생기는 것이다. 새롭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끈적끈적한 일상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눅눅하고 처진 생각들을 다시금 튀어오르게 한다. 위 시에서 '첫 마음을 잃지 말자'라고 시인은 계속 말한다. 첫 마음을 계속해서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첫 마음은 쉽게 왜곡된다. 쉽게 왜곡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와의 타협, 자신과의 타협일 터이다. 타협이 하나둘씩 삶에 덕지덕지 묻어나게 되면, 무거운 일상들이 시작되는 것이다. 초심을 잃어가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끼가 자라나는 것과 같은 것. 닦아내지 않으면 초심의 본 모양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삶을 반복함에도 떨쳐내지 못하는 부족한 용기. 그늘진 곳으로 향한 이러한 타협은 마음의 이끼도 자라나게 한다.

 우리가 참혹하게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라 생각한다. 우리는 늘 이상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어느새 마음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있다. 해야한다는 당위성이 만들어낸 단조로운 일상이 본인의 모습을 갉아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참 정의로웠다.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그것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타협들을 했던가. 볕이 아닌, 그늘로 얼마나 많은 하강 운동을 반복해 왔던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늘로 향한 관성을 멈추자. 모든 것들을 내려놓더라도 첫 마음으로, 순수한 정신으로, 고매한 눈동자로 다시 시작하는 영혼들이 사회에 가득했으면.

 

 

『노랑』오봉옥 (노랑, 한강대교 2)

'요즘은 독해가 어려운 모호성을 조성하는 추세가 보편화되어 있다. 또 동어 반복의 타성에 빠지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아류가 돼 버리는 현상이 생긴다(유종호)'. 저는 농부 시인 서정홍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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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돼지라 하는가 (『노동의 새벽』, 박노해, 민중시)

시인의 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박노해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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