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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유하

by 짙음새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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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밀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 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 몸인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뿐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유하

 

생명력과 사랑

 사랑은 생명력이 넘치는 행위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라는 작품은 '기다림'과 '충만'이라는 작품 사이에 위치해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암시하듯이 말이다. '생명의 나무'에는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새가 한 마리 앉아있다. 즉 사랑이라는 것은 생과 죽음이라는 순환을 이루는 데 본질적인 요소임을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사랑은 생동감이 넘친다. 한 사람이 내 삶에 다가오는 순간. 기다림이 시작된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기다림이라는 것은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한 대상을 생각하고 마음을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디에 가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그 모든 과정이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 바로 기다림의 시간이다. 

 위 시에서는 그러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사막은 사랑하는 이가 올 것이라는 상상을 통해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된다.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으로 변화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은 오지 않았지만, 화자가 상상하는 세계는 매우 풍요롭다. 사막, 모래알, 전갈, 낙타의 등, 독수리의 부리는 '가난한' 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사랑하는 이가 온다면 오히려 생명력의 상징으로 변한다. 모든 어둠과 그늘, 모순과 거짓, 해악은 빛과 양지, 조화와 진실, 선(善)으로 모습을 바꾼다. 이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새로운 가설의 등장이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처럼. 그 하나의 반박으로, 그 하나의 존재만으로 모든 것들이 변화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고, 새로운 도전. 세계 자체를 변화시킬 무시무시한 힘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방문객」, 정현종

 그 세계가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세계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다져온 굳고 단단한 시간이, 나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기나긴 시간으로 퇴적되고 단단해진 시간은 나에게 날아오며 속력을 붙인다. 일정한 질량과 속력을 가진 그 사람은 나의 세계를 부순다. 한 차례, 두 차례 지속적인 충돌. 결국 나의 세계는 금이 가기 시작하며 그 세계가 내 안에 뿌리내릴 수 있게 틈을 벌려준다. 기다림은 그러한 모든 과정이다. 내 세계 안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그 색깔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위의 시처럼. 그 색깔은 생명력이라는 이름으로 칠해진다.

 위의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이 올 경우를 가정한 세계이다. 위 시에서 사랑하는 그 사람이 온 것일까?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내 세계의 변화는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물 혹은 세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구체적인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령은 당신의 책 '눈물 한 방울'에서 참새를 그려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리기 쉽지 않았고, 그동안 참새를 몰랐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린다는 것은 구체적인 인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사랑하는 이가 와서 변화할 세계는 구체적인 언어로 그려지고 있다.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구체성을 갖고 실존하고 있는 세계라고 봐야 한다. 세계를 시의 언어로 그려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세계와 자유의 범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다림으로 세계는 구체화되고, 나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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