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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정말로 사랑한다면 - 사랑에 관한 시 모음 (2)

by 짙음새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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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별 닦는 나무, 공광규

출처: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3)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로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로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출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출처: 시집 《풍장》 (문학과지성사, 1999)

 

 

 황지우 시인은 군사 독재 시절을 살아가며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탄압을 받기도 했다. 민주화를 향한 그의 갈망은 시집에서도 드러난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교과서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시이다. 그 시에서는 화자는 독재 정권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짓된 자유 속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절망감은 스크린에 비치는 애국가 영상으로 더욱 강조된다. 이처럼 어려운 시절에 살았지만, 시인은 숨지 않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도난당한 편지'에서 나오는 역설처럼 오히려 그들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숨긴다. 그래서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너'를 민주화로 사람들이 많이들 해석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시인들의 피난처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만해가 시에서 '님'을 그려냈듯이 말이다.

 오늘은 시대적 배경을 조금 걷어내고 사랑에 대한 시를 몇 편 정도 더 준비했다. 사랑의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이 사랑의 튼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사랑의 근거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사랑의 첫 번째 근거는 '기다림'이지 싶다. 오늘 학교에서 학생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로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그 단어 중에서 '기다림'이 있었다. 사랑에서의 기다림은 지난 시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수동적인 상태로 상대가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서의 기다림이란 능동적인 상태로서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행동이다. 요즘따라 기다림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특히 나는 상대와 함께 있는 순간에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숙성되지 못한 말로 상대에게 다가가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었다. 상대와 마음을 나눌 수 있으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요하게 상대와 내가 다가가는 속도를 맞추어 나가는 것이 바로 기다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림이란 상대에 대해 관심을 주고 다가가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조하리의 창' 이론에서는 상대와 내가 공유하는 영역들을 창에 비유한다. 내가 알고 상대도 아는 영역(열린 영역), 내가 모르고 상대가 아는 영역(맹목 영역), 내가 알고 상대는 모르는 영역(숨겨진 영역), 나도 상대도 모르는 영역(미지의 영역)을 각각의 창으로 부른다. 위의 네 가지를 설명하면서 '내가 알고 상대도 아는 영역'을 적절하게 확장시키는 사람이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기다림이다. 서로에게 열리는 속도를 조절해 가는 것은 다가감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고 있지만 상대는 기다리는 동안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나와 너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는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섣불리 내 생각을 상대에게 적용시키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상대도 동일하게 느끼고 행동해야 해'라는 은연 중의 감정은 서로의 관계를 더 닫히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기다림과 다가감의 적절한 조화로 탄생하는 생명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 사랑의 근거는 무엇일까? '주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를 내려놓고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주는 것'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헌신이지만, 스스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이는 희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공광규의 시에서 은행나무는 사랑하는 사람의 별을 비질하면서 노랗게 물든다. 비질을 하면서 화자는 순금의 물이 들어 아름답게 변화한다. 대상을 사랑하는 감정이 스스로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는 아름다운 존재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것들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미로서 '주는 것'이다.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에서도 그러하다. 한 그루의 나무는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줌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하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으로 물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에서도 온전함을 느낄 수 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라는 구절에서도 보듯, 사랑하는 사람이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대한 존재로서 위치를 차지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있다. 다만 애정하는 대상이 괴로움에 시달릴 때 함께 있어주고자 한다. 이러한 행위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이러한 화자의 모습들이 모여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과 '주는 것'의 사이에서 우리는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고 변화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기다림과 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한다. 최근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세상에 태어나서 꼭 한 번은 해 봐야 하는 것이라는 책의 목차를 문득 봤었다. 그 목차에 '한 사람을 마음을 다해 믿어보기'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누구 한 사람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가? 믿으며 기다리고, 줄 수 있는가? 사람을 믿는 것이 어려운 시대에서, 사람을 믿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온전한 사랑을 줄 때 우리는 어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진실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른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스며든 적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현대 비판시)

시인의 말 분열하고 명멸해왔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2008년 봄, 심보선 서평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유머로 빚어진 아이러니의 세계이다. 자잘한 일상 속으로 거대 담론들이 비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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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의 사랑, 허수경 (사랑 시)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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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허은실 (회복기 1, 꾸다 만 꿈)

제주도에 여행을 갔습니다. 소소한 책방이라는 곳에 들렀더니 '숨겨둔 책'이라고 포장된 시집을 팔고 있었지요. 소개하는 글귀에 '이 책은 앓고 난 후, 조금씩 나아지던 기분 좋은 가벼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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