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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우리 아이라고 무사할까? - 생태에 관한 시 모음, 생태 시 모음

by 짙음새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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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끝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공장지대, 최수호

출처: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 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골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바람에서도 화약 냄새가 난다.

종소리에서도 가스 냄새가 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꽃과 노래와 춤으로 덮였던 내 땅

햇빛과 이슬로 찬란하던 내 나라가

언제부터 죽음의 고장으로 바뀌었는가.

 

번쩍이며 흐르던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스스로 부끄러워 몸을 비틀고

입술을 대면 꿈틀대며 일어서던 흙이

몸 가득 안은 죽음과 병을 숨기느라

웅크리고 도사리고 쩔쩔매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죽음의 안개가 이 나라의

산과 들을 덮게 되었는가.

쓰레기와 오물로 이 땅이 가득 차게 되었는가.

 

우리는 너무 허둥대지 않았는가.

잘살아보겠다고 너무 서두르지 않았는가.

이웃과 형제를 속이고 짓밟더라도

잘살아보겠다고 너무 발버둥치지 않았는가.

그래서 먼 나라 남이 버린 것까지 들여다가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 해서 이미 버릴 데가 없어

쩔쩔매던 것까지 몰래 들여다가

이웃의 돈을 울궈 내려 하지는 않았는가.

몇푼 돈 거둬들이고 울궈 내는 재미에

나라는 장사꾼과 한통속이 되어

이 땅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지는 않았는가.

이 나라를 온갖 찌꺼기

모으는 곳으로 만들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안다. 썩어 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 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 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뿌옇게 지구를 감고 있는

연기와 먼지는 드디어

온통 이 세상을 겨울도 봄도 여름도 없는,

삶도 죽음도 아닌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연옥도 지옥도 아닌 버려진 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돈에 눈이 멀어 허둥댄 것이 우리만이 아니란 것을.

 

그러나 그것도 이미 좋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 지구는 언제 폭발해 저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으로 가득 차 있다.

핵은 우리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우리들의 발 밑에서, 우리들의 등 뒤에서,

죽음의 입김을 서서히 내뿜으면서

그 음험한 눈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

보라, 삼천리 그 가운데서도 남쪽 반

이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만도 많은 핵 발전소가

돈이 덜 든다는 구실 아래

곳곳에 도사려 우리를 집어삼킬

채비를 서두르고 있지 않은가.

또 저 북녘 굶주린 땅에서도

전쟁을 막는다는 핑계로 쌓인 핵들이

단숨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죽음의 재로 덮을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경림

출처: 『어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최근 한 유튜브를 보다가 "오늘 4천만 원을 썼어"라며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을 봤다. 4천만 원을 하루 만에 쓸 수 있는 재력이 부럽기도 하였으나, 마음 한 구석이 그리 편치는 못했다. 왜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까? 그토록 부러워하면서도 말이다. 나는 인터뷰하고 있는 그 사람의 사뭇 당당해 보이는 태도에 마음이 쓰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나름대로의 노력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샌델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과연 그들의 노력만으로 부자가 된 것일까? 나는 샌델의 의견에 조금 더 동의한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노력과 운이 함께 잘 마주쳤을 때 가능한 것이다. 100% 노력도 없는 것이고, 100%의 운도 없다. 운에 의해 부와 힘을 가졌다면 겸손이 미덕일진대, 그들이 본인의 노력만으로 얻은 운인 듯 착각하고 으스대는 것이 볼썽사나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곤 그들만의 잘못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 스스로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찬찬히 돌아보니 그것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뽐내게 만드는 사회적 이념도 한몫을 했다. 그것은 아마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야수적인 자본주의 체제였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견제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의 각 국가들은 복지를 강화하여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면서 발전해왔다. 최근 '다음 침공은 어디'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미국인이 나와 여러 유럽 국가들의 복지 제도를 배워가는 내용이 나온다. 그중에서 나는 핀란드의 교육이 매우 흥미로웠다. 핀란드는 학교에서 숙제를 거의 내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 밖의 다양한 삶을 온전히 배우도록 시간을 그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서는 배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대화와 교류를 통해 인간은 성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은 어떠한가? 피터스가 말하는 외재적 목적을 둔 교육을 자랑스럽게 시행하고 있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고 가기보다, '내 실력보다 조금 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다. 이는 사회적 지위를 위한 경쟁을 본질에 두고 있다. 이러한 경쟁이 공부를 하게 이끄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생각도 물론 한다. 그러나 교육 그 자체, 배움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않고 지속하는 학업은 힘을 잃기에 좋다. 이렇듯 교육이 왜곡되어 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욕심은 차오르고, 욕심이 결국 우리에게 그 활시위를 겨누기 시작했다. 더불어 살기 위한 노력들이 점차 말라가고, 사람들은 파편화되어 자신의 땅 넓히기에 바쁘다. 경쟁을 통한 교육은 씨앗이 되어, 욕심과 다툼의 나무로 자라고 이는 자연스레 자연에 대한 물질적인 관점으로 나아간다. 즉 자연을 이용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방향으로 사고가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 어떻게 훼손되는지는 당장에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금전적인 이득이다. 
 '개릿 하딘'은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공공재가 어떻게 파멸로 나아가는가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다. 우리는 공짜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에 솔깃하기 쉽다.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면 우선 입가에 미소부터 생기니, 공짜에 대한 사랑은 인류 공통의 마음인 듯하다. 공공재도 '공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를 통해 이윤을 취하려고 한다면 공공재는 한정되어 있으니, 빠르게 고갈되는 것은 명약관화 같은 것일 테다. 그러나 공유지의 비극에서 말하듯 당장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우리는 욕심을 내어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이에 서서히 공공재는 파괴되어가고, 이는 결국 욕망에 의한 파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게임 이론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개인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결국 사회적 비효율을 초래하는 것을 게임 이론에서는 말한다. 스스로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공공재를 조금만 서로 아끼더라고 해도, 지속 가능한 이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시에서 나라가 장사꾼과 손을 잡고 더욱 환경을 훼손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가 특정 기업인과 손잡았다고 말하기 보다, 더 나아가 그 근본적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장사꾼이라는 것은 결국 거대한 자본일 것이고, 자본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굴러가는 열차다. 결국 자본과 손을 잡고 지속적으로 자연을 훼손하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이 개선될 여지는 없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인 것이 바로 교육일 텐데, 그 교육 또한 자본주의의 힘에 눌려 말 한마디를 못하고 있는 현실이니 서글프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에 또다시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교육사회학의 갈등론적 관점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이 결국 '교육'을 통한 사회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애플의 헤게모니 이론에서도 그와 같이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의 욕망은 암처럼 커져서, 다시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장지대'라는 시 속에서는 정말 끔찍한 우리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기형아를 낳은 산모는 슬픔을 느끼며, '저 굴뚝들과 간통 한 것이 분명하다'라는 표현을 한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인간이 필요한 물건과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서 공장 등 경제 발전들이 이루어졌는데,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니 말이다. 아이 어머니의 '정수리의 털을' 뽑는 행위는 슬픔을 넘어 안쓰럽기까지 하다. 과연 그 산모의 죄인가? 산모의 책임인가? 그들도 운이 나빴던 것이지 않을까? 첫머리에 밝혔듯 노력과 운이 잘 만났을 때 그 사람은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운이라는 요소가 꽤나 크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사임당'이라는 인플루언서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10가지 사업 아이템이 있다면 그중 한 개 정도가 성공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분산해서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결국 운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운에 대한 작은 책임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운 좋게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을 때 하는 협상이 가장 정의롭다고 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얼마만큼의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재화를 분배하는 협상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재화 분배를 하고 스스로 부와 권력의 정도를 공개한다고 했을 때, '내가 가난할 가능성'을 누구든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가난한' 상황을 대처할 수 있도록 가난한 사람을 위해 복지혜택을 최대한으로 제공하려 할 것이다. 이 개념이 바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가도록 협상한다는 존 롤스의 정의론이다.
 샌델 또한 이러한 정의론이 너무나 이상적이라고 비판을 하지만, 나는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무지의 베일은 결국 '운'이라는 개념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다.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대한 맹신이 나타난다. 학력과 부가 있는 사람은 그만큼의 노력과 능력이 되는 사람이고 생각하고, 그들의 욕심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에서 나온 열매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즉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한 운은 달아나기 쉽다. 그래서 그 운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그리도 치열하게 맞서는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욕심. 그 욕심이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을 끊어낸다. 그렇게도 끊어낸 결과,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생태 앞에서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 공격을 막을 가장 든든한 방어구는 무엇일까? 다시금 우리가 연결되는 것이지 않을까? 나와의 연결, 사람과의 연결, 자연과의 연결. 그 연결을 위한 교육, 생명의 교육이 이루어져야할 시기에 우리는 놓인 듯하다.

 

 

 

진달래꽃, 김소월 (이별 시, 아름다운 시)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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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 - 천상병 (깨달음 시, 달관 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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