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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봄의 언어 - 봄 시 모음, 봄 시 세 편 (3)

by 짙음새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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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꽃들아 안녕,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1, 나태주

 

 '꽃 사세요. 꽃 사세요!' 봄이 되어 학생들의 노랫소리가 교사실로 들려온다. '꽃 파는 아가씨' 노래가 학교에 울려 퍼지면 노래 따라 학교 곳곳에 우직하게 버티고 있는 소나무도 어깨에 힘을 빼고 봄맞이를 위해 이파리를 흔든다. 이전 학교에서 봄맞이 인사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싱그럽다는 표현을 했다. '싱그러운 아침입니다'라고 말이다. 봄이 되어 모든 것들이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 같다. 학교로 올라오는 길가에 난 개나리 나무에 꽃 한두 송이가 폈다. 어찌나 예쁘고 고운지 모른다. 꽃 따라 봄도 얼굴을 빼꼼히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란색은 수줍은 색인가도 싶다. 노랗게 핀 한두 송이의 개나리가 부끄러운 듯 말을 거는 것 같다.

 개학을 하고 벌써 학년별로 수업을 다 들어갔다. 1학년은 긴장을 하는 눈치고, 2학년과 3학년은 여유가 제법 있는 눈치다. 오늘은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책을 발췌하여 읽었다. 발췌해서 읽은 내용은 '보통 사람'에 대한 박완서 작가의 생각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관계를 맺고 살아갈까? 박완서 작가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 스스로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오만한 기준이라는 것인지 고백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사람들과 충분히 알아갈 시간을 갖지 않고서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짧은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절대자로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절대자는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어떤 모습'이라는 것을 믿는 것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의 모습 그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거나, 어떠한 것을 좋아하거나, 어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악한 모습보다 선한 모습을 믿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박완서도 어떤 사람의 좋은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학기 초에 이러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누었던 이유는 서로 좋은 눈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꽃을 보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풀꽃 1'에서도 말하듯이 말이다. '자세히 보는 것'은 관찰의 한 방법이고 '오래 보는 것'은 기다림의 방법이라고 우리 학교 학생이 발표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믿기 전에 '자세히 보'며 마음을 다해 살펴야 하고, '오래 보'며 모습이 잘 드러나도록 곁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사람을 믿는 첫 걸음인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회에서는 충분히 익어가는 시간을 갖기 어려운 구조인 듯하다. 유튜브에 흐르는 엄청난 정보들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섬네일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짧은 것을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은 은연중에 남아 사람들을 판단할 때에도 사용된다. 특히 이념의 대립과 같은 경우 충분히 살피지 않고, 대안이 없다는 듯 다른 생각들은 쳐내기 바쁘다. 이러한 생각의 양극화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꽃들아 안녕'이라는 시에서 화자가 하는 행동과는 달리 우리는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순간들을 잊고 살아간다. 모든 것들이 휴대폰 속에 다 들어있다. 식탁에서도,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우리는 눈을 휴대폰에 두고 있다. 그 시선들이 모이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면 아득한 마음이 든다. 시선이 진정으로 가야 할 곳은 위, 아래, 양 옆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시선이 마르는 곳에는 대화가 있을 수 없다. 대화가 없는 곳에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생명이 없는 곳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없는 곳에 사회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지만 참 역설적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더욱 파편화되고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쩌면 진정한 의미인 사회 속에 살아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휴대폰과 일심동체가 되어가는 것이 우리들의 잘못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대답은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죄책감 없이 사살하고도 무죄를 외친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봄을 맞아 나는 생각해본다. ChatGPT라는 소프트웨어가 우리의 글쓰기까지 대신할 수 있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계들이 할 수 없는 일이지 싶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일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일들. 그리고 대화하고 감정을 나누는 일들. 이런 것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이지 않을까?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사람은 그늘을 만들 수 있다. 그늘을 만들어 누군가를 포근하게 쉴 수 있게도 하고, 그 깊은 속에서 함께 소통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우리가 넓혀가야 할 그늘을 꾸준히 넓혀가는 것. 기계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나, 인간에게서는 매우 중요한 것들을 조금씩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봄의 의미가 하나하나 감정이란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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