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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날 닮은 사람과 평생 살 수 있나요? - 소유냐 존재냐

by 짙음새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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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닮은 사람과 평생 살 수 있나요?

 유튜브를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솟아오를 때가 있다. 선남선녀인 사람들의 즐거운 삶을 볼 때이다. 그들은 사랑을 듬뿍 받는 듯,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눈에는 생동감이 넘치며, 근심이나 걱정은 찾아볼 수 없는 맑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 입꼬리는 축 처지고, 눈에는 피로가 가득하며, 푸석푸석한 하루를 보낸 듯한 내 피부와는 확연히 대조된다. 그러곤 망상이 싹튼다. '나도 저런 삶을 살아보고 싶다.', '나도 잘났으면 좋겠다.' 등의 망상들이다. 이러한 망상은 꽤나 타격이 크다. 이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고, 나의 기분은 가라앉는다. 잘난 몇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남들이 일으킨 그 매력적인 망상은 내 생각을 온통 헤집어놓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까지 시간이 참으로 오래 걸렸다. 될 수 없음은 냉소의 시선이 담긴 허무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서야 깨닫는다. 나는 타인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 즉 스스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의 삶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 내 존재는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만 바라보다 보니, 내 모습을 돌아볼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또 다른 사람의 외적인 모습. 즉 직장, 동산, 부동산. 나보다 많은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 나는 괴로움에 잠겼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라곤 한 채의 집, 그리고 대출금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비교는 자존감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를 임상심리학자 허지원은 '외적 자존감'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내적 자존감이다. 이러한 내적 자존감은 소유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자유, 사랑, 희망 등은 돈이 많다고, 넓은 집이 있다고, 좋은 차를 탄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도 그러한 면을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다.

가진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에서 생기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 양식에는 없다. 만일 내가 '존재하는 나'이고, 소유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내 안정감과 주체성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이고 지적인 창조의 힘 등 모든 본질적인 힘은 표현되면서 자라난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외적인 풍요로움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또 측정할 수도 없다. 이들은 소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요소는 외부적인 것들로 얻어지기 어렵다.
물론 외부 환경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외부의 환경에 따라 내적인 경험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교육 심리, 사회학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슈테른에 따르면 환경에 따라 인간의 기질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어떠한 분야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환경에 따라서 그 재능이 발휘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외부적 환경, 즉 소유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상속, 국적, 사회 보장 제도 등은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것이라 보긴 어렵다. 또한 그것들이 개인을 설명한다고 보기엔 어렵다. 어떠한 환경에서 태어나든지 넓은 집, 비싼 차 등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태어난 환경 이후의 문제. 즉 소유냐, 존재냐하는 문제에 대한 주체적 선택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자기 자신의 생산적인 힘에 대한 믿음의 부족, 퇴보하려는 경향, 내적인 게으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명을 스스로 맡기려는 마음. 이런 것들 안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내면의 자유는 주체를 바로 세움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생명이 도구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개인은 힘을 잃고, 간판 아래 가려 스스로를 규정한다. 존재가 아닌 소유의 그늘에 가려져 버린 것이다. 소유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기 바쁘다. 이러한 비교하기 바쁜 삶은 경쟁으로 이어지고, 경쟁은 갈등으로 이어진다. 내 삶을 획일화된 조건에서 찾아오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행복의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타인의 행복의 기준을 나에게 적용시키는 것에 대한 부당함,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존재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다. 모든 외부 요인을 다 내려놓고, 나와 같은 사람과 평생 살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긍정으로 이어지게끔 자아와 화해하고, 사회의 불편한 모습들에 깨어있는 것.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존재하는 나로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존재로의 발걸음

 사회학자 서지오반니는 집단을 두 개로 분류하였다. 어떠한 목표를 위해 구성원이 수단이 되는 집단을 '조직'이라고, 구성원 그 자체가 목표인 집단을 '공동체'라고 불렀다. 우리는 현대 사회가 되면서 주로 조직 내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띄는 것도 인류가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는 공동체의 기능을 발전시켜왔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한 조직들은 참으로 많다. 그중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대표적인 공동체는 아마 가족이지 않을까? 그러나 현대에 들어 가족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라다크 부족의 변화를 자본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서는 자본이 개입하고 나서 변화된 라다크 공동체의 붕괴를 잘 보여준다. 라다크에서는 자연의 변화에 따라 인간도 성장하는 순환적 질서를 가진 공간이었다. 농촌에 사는 아이들을 나이 든 사람이 돌보고, 아이들은 그러한 보살핌 아래에서 정서적 지원을 충분히 받으며 자란다. 또 다양한 일손들을 서로 도우면서 농촌에서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본이 개입하자 점차 공동체의 성질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라다크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레'에 청년들이 나가면서 농촌에 일손들이 부족해지고, 농촌에서는 청년들을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구해와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이에 따라 농촌 사회의 순환이 점차 붕괴되었다. 이에 전에는 없던 문화가 생겨난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자신만을 위한 생각들이 싹튼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사랑과 연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랑과 연대는 사람들과 다양한 소통을 통해 쌓여나가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교류가 가능해지고, 교류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교류가 막혀 있다면, 정서적 안정감이라는 근원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른 방법들을 강구하게 된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는 층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정서적 욕구, 사회적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그중 정서적 욕구는 누군가와 감정을 교류하고픈 욕구이다. 즉 인간은 자아실현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정서적 욕구가 실현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소유를 중심으로 삼는 인물은 좋아하거나 찬양하는 인물을 갖기를 원한다. 이는 어버이와 자식, 그리고 친구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어느쪽도 상대방과 단지 즐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독점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자기의 상대방을 마찬가지로 소유하려 드는 다른 사람들을 질투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육의 현실을 보라. 과연 우리나라와 같은 현실에서 정서적 욕구가 잘 실현되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는 공동체라기 보다는 조직에 가깝다. 학생들을 어떻게 해서든 좋은 대학을 보내려 경쟁하는 학교나 학부모님들의 욕망을 보고 있으면 슬픈 마음이 든다. 좋은 대학이라는 허울 아래 서로 나뉘고 싸우는 그들의 아귀다툼은, 결국 청소년들의 가슴에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상처로 말이다.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청소년기에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정체성이다. 그 외에도 나이대별로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한다. 이를 발달과업이라고 하는데, 이를 잘못 수행할 경우 잘못된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순환하는 동물이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성격을 형성하고 다시금 또 다른 사람을 키워낸다. 이러한 순환의 고리는 정서적 안정과 연대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존재는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존재로서의 나다. 강영택은 마을, 교육, 공동체라는 책에서 마을교육공동체가 미래 교육의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공감, 연대가 이루어짐으로서 다양한 사회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다들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면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보다, 심지어는 옆 친구보다 '잘나 보이기' 위하여 오늘도 아이들은 굴레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공간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욕망의 교육이 아니라, 연대의 교육을 지금부터 실천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대량으로 생산하더라도 무한한 욕망을 결코 따라갈 수 없으니, 사람들은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적대할 것이 틀림없다.

 

 

누가 돼지라 하는가 (『노동의 새벽』, 박노해, 민중시)

시인의 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박노해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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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든 적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현대 비판시)

시인의 말 분열하고 명멸해왔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2008년 봄, 심보선 서평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유머로 빚어진 아이러니의 세계이다. 자잘한 일상 속으로 거대 담론들이 비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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