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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사회는 얼마나 더러워질 수 있는가 - 동물농장

by 짙음새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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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썩은 나라가 있을까?

 "썩어도 썩어도 이렇게 썩은 나라가 있을까? 청년들이 정의를 외치지 않아. 정의를 외치면 따(왕따) 된단 말이야." 나는 고등학교 때 윤리 과목을 선택하여 수업을 들었다. 뭇 수험생들처럼 나도 인터넷 강의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때 모니터로 만난 선생님이 이야기했다. 사회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들은 청년들이라고. 그리고 청년들이 정의를 외치지 않는 순간 그 나라는 암울하다고 했다. 나도 청년으로서 참 부끄러운 마음이다. 나는 나라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하기보단, 내 개인적인 삶과 미래를 위해 모든 순간들을 집중했다. 사회적으로 보이는 순간순간의 모순들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나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에 지금에 그 선생님의 말씀을 돌이켜보니 청년으로서 삶이 참으로 가물었지 싶다. 정의, 신뢰, 공존 등의 가치가 말라버린 나의 삶을 돌아보자니 이따금 '그래도 너는 최선을 다했잖아'라는 합리가 나의 발목을 잡는다. 맞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모순 속에 나를 끼워넣기 위한 몸부림이 나의 청춘의 세월이었다. 

 최근 MZ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세대 간의 갈등이 눈이 띄게 드러나는 듯싶다. 언어가 만든 틀로 사람을 끼워 맞추려니 모순들이 많아 삐걱거리는 것들이 보인다. 한 집단을 어떠한 특성으로 규정짓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이는 언어로 만든 폭력이라고도 느껴진다. 최근 민들레라는 잡지에서 주재성이라는 분이 쓴 사설을 읽게 되었다. MZ세대라는 용어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소비문화를 형성함으로써, 기업들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판매에 있어 주 대상층을 파악하고 트렌드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기업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본의 논리가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서 세대를 나누고, 서로 간의 긴장을 유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니 슬픈 마음이 앞선다.

 MZ세대를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자유로운 세대, 스마트 기기를 잘 활용하는 세대, SNS 등으로 소통하는 세대 등도 매우 편협하게 느껴진다. 언어로 세대를 담아낸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뭇 어른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MZ세대를 버릇없는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버릇이 없고, 충동적이며, 진득하지 못한, 그런 세대.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정의감도, 사명감도 없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 간다. 이는 다수의 시선으로 깎아내는 마치 조각상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의감이 없을까? 사회적 모순에 대한 자각이 없을까? 몇 개월 전에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은 다 같이 모여 교문 앞에서 입장문을 내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이야기했다. 또 한 대학교에서는 청소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대자보를 붙이고, 집회를 벌이는 등의 모습들을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핏발 한 가락 서지 않은 맑은 눈은 그대로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청년들을 믿는다. 모순의 자각을 위해서는 우리 내면을 채워나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가 진정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잘 알아야 한다. 개개인이 올곧게 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올곧게 선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위해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다. 또 자신의 의견을 타인과 공유하여 연대함으로써 담론을 확대, 생산하며 꾸준한 노력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요즘은 특히나 영상 매체에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통해 생각의 고착화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소셜 딜레마라는 다큐멘터리에서도 다양한 영상 플랫폼들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고 이야기한다. 극단적인 생각들을 재생산하면서 소통을 단절하고 있다며 말이다. 진정한 앎은 타인과 타인의 생각에 대한 앎이다. 자신이 교류하는 생각과 타인이 자유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단절된 사고, 극단적인 사고로 스스로를 채워 넣게 되면 이는 그만큼 자유를 잃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정보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오히려 자유가 구속된다는 것이 참으로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똑똑한 국민들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정치인들은 다양한 생각을 하는 국민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모순을 자각하는 국민들이 많아지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바보로 만들어 자신의 세력으로 종속시키는 것을 원한다. 동물농장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스노볼을 쫓아낸 나폴레옹은 동물 사이에 만든 규칙들을 돼지들에게 유리하도록 조금씩 고쳐가면서 자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해 나간다. 동물들은 그 조용한 폭력에 조금씩 희생되어 간다. 깨어있는 민중의 부재가 그토록 처량한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자유의 의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본다면 진정한 앎이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앎에 대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가? 편협적인 정보를 통해서는 진정한 앎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진정한 앎은 풍성하고도 유연하다. 헤겔의 변증법처럼 사고가 융합과 융합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과 반의 융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반대 주장에 대한 자각, 반대 측에 대한 배려, 이해가 있을 때 열매처럼 맺어지는 것이 앎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러한 앎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기에는 매우 어려운 구조라 생각이 든다. 알고리즘과 수많은 가짜뉴스, 정치적 선동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의 특징은 효율성과 속도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지 싶다. 효율적이지 않은 것들은 하나씩 우리 사회에서 죽어간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인간은 가장 비효율적인 존재이다. 아이들을 보면 비효율의 총체이다. 아이들은 작은 벌레 하나, 작은 사물 하나도 주의 깊게 보고 곱씹어 본다. 놀이터에서 노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제각기 규칙이 다르다. 보도 블록 위에서도 그들은 놀 수 있다. 빨간 보도 블록만 밟고 집에 가기, 보도 블록 사이 공간 흙으로 메워보기 등 온갖 아이디어로 논다. 놀이는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나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후이징가는 인간을 놀이하는 동물로 정의 내렸다. 즉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놀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극단적인 효율성이라는 굴레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우리는 불편하게 하루하루를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효율성을 추구하다보니 최근에는 로봇에게 대신 맡기는 것들이 많아졌다. 단순한 노동들은 벌써 로봇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 최근에는 AI가 직접 소설까지 쓴다고 하니, 심란한 마음이 든다. 우리의 생각마저 대신해주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의 생각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은 다양한 동영상 매체이다. 몇몇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를 거르지도 않고 섭취한다. 그러는 중에 그러한 몇몇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게 된다. 정보의 범람은 이토록 큰 재앙이다. 어쩌면 정보로 인한 익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정보를 가려내고 헤엄쳐 살아남는 것. 이는 진정한 앎이 바탕되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최근에는 정보에 대한 조급함마저도 느끼는 것 같다. 최근에 우리 학교에서 강의가 하나 있었는데, 강의해주신 선생님께서 '정보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라는 학생의 질문에 이렇게 물었다. '어떤 정보를 찾고 싶으세요?' 그랬더니 학생은 우물거리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과연 어떤 정보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우리는 정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급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어떠한 정보가 내 삶에 필요한지 사색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이에 우리는 더욱 매체들에게 의해 흔들리고 생각이 은연중에 굳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진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는 많이 없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자유는 많은 정보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내면에서 차오르는 것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거짓과 선동의 세계

 거짓도 진실이 될 수 있는 사회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라는 학자는 원본에 대한 복제본이 하나의 진실이 되어가는 현상에 대해 「시뮬라시옹」이라는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복제가 일어나는데, 복제를 만드는 것을 시뮬라시옹이라고 부르고, 만들어진 복제품을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여기서 복제품은 자율성을 가지고, 원본으로부터 새로운 존재로서 자리 매김한다. 이러한 현상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디즈니에 나오는 미키 마우스는 쥐를 복제하여 만들어졌으나, 미키 마우스는 '생물학적 쥐'라는 원본에서 멀어져 새로운 존재로서 자리매김한다. 현대 사회에는 복제에 대한 복제도 계속 일어나는데, 이러한 복제들의 집합이 현대 사회인 것이다.

 이에 거짓에 대한 모방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잘 꾸며진 거짓의 세계이다. 우리는 디즈니를 보며 열광하고,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감정을 자기 것처럼 느낀다. 이 모든 것은 잘 가꾸어진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속성은 금세 대중들에게 이빨을 드러낸다. 동영상과 검색 포탈의 알고리즘이 이러한 꾸며진 거짓과 결합하며, 사람들은 잘 꾸며진 세계 속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달걀 사건 때 반란을 주도했던 암탉 네 마리가 나와 스노볼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서 나폴레옹의 명령에 불복하도록 사주했다고 진술했다. 그들 역시 처형되었다. "

 나폴레옹은 대중들의 이러한 속성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잘 꾸며진 세상. 말은 곧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이었다. 현대 사회도 다양한 가짜 뉴스들이 성행하고, 그 뉴스를 통해서 다양한 사실들이 생산된다. 이는 거짓 위에서 존재하지만 신기하게도 사실이 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실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보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방향으로 모이고, 모이는 곳에서의 권력을 이용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서 사회적 갈등이 영상 매체와 검색 포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떳떳한 진실 위에서 사유하고 있는가? 대답하기 어렵다. 현대 사회의 정보의 범람 위에서 사실을 가려내는 것은 참 어렵고도 험난한 일이다. 사람들은 잘 꾸며진 거짓을 오히려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이러한 선호 심리는 진실을 직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청년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윗세대들은 서로 가진 것을 지키느라 바쁘다. 행여 집값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훗날 자신을 부양해줄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있다. 진정한 어른. 쓴소리 하는 어른들은 조금씩 말라가는 것 같다. 이에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 그 위안처를 제공해주는 정치 세력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 고달프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청년들이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거짓에 허덕이지 않는 그런 세상. 거짓을 부끄러워하는 세상. 우리 함께 애쓰며 고민해 나갈 일이다.

 
동물농장
20세기 영미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 조지 오웰 정치권력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빼어난 우화 문학의 사회 비판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담긴 위대한 풍자소설 ▶ 랜영리하고 동정심 많고 진실을 깨우치는 우화. -《뉴욕 타임스》 ▶ 절대적으로 최고의 작품. 볼테르와 스위프트에 견줄 만하다. -《뉴요커》 ▶ 조지 오웰을 대신할 만한 작가는 없다. -《타임》
저자
조지 오웰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0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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