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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공터의 사랑, 허수경 (사랑 시)

by 짙음새 2023.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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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공터의 사랑, 허수경

출처: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기억도 썩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억이 썩는 것을 망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망각 없이 살아가는 삶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다치게 하는 수많은 일들을 우리는 마주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소중한 것들이 주위를 떠나갈 때, 망각하지 않는다면 쇳덩이 같은 마음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할 테지요. 요즘 들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반려동물은 말이 동물이라 부르지 사실은 가족과 같습니다. 가족과 같은 무게로 그들이 삶을 지탱하고 있지요. 문제는 대부분의 반려동물은 수명이 사람보다 짧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는 떠나보내는 것도 함께 생각하여 신중해야 할 테지요. 빈자리의 고통이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반려동물을 분양받습니다. 그리고 이별을 맞이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들을 마음으로 떠나보내지 못한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커집니다. 앞서 말했듯 모든 일상에 빈자리만큼의 무게가 더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망각은 그 마음을 덜어주는 인간에겐 없어선 안 될 안전장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망각이란 완전히 대상을 잊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게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내었을 때 한동안은 반려동물이 일상 깊숙이 파고듭니다. 모든 사물,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이 물들어 있음을 자각하게 되지요. 그러나 망각이라는 것은 이를 조금씩 빨아내는 작업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색이 반려동물에 물들어 있었다면, 조금씩 그것을 빼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김치국물처럼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메를로 퐁티가 말한 것처럼 접힌 부분이 되겠지요.

 허수경 시인의 위의 시는 사랑과 망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연에서 '썩었는가 사랑아'라 말하는 것은 망각을 위한 물음이라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랑했던 이를 씻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찌든 때처럼 꾸덕꾸덕하게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은 가만히 되뇌게 될 것입니다. 얼른 잊히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어느새 흐릿해져 갑니다. 사랑이 나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사랑했던 이와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앞선 비유처럼 이별이라는 것은 꽤나 짙은 농도로 일상에 물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헤어져 본 사람은 이 말뜻에 쉽게 공감할 겁니다. 헤어지고 나서 같은 우연히 같은 카페, 음식점을 들어갈 때 떠난 이가 함께 떠오릅니다. '이별맛집'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 속에 단골 맛집에 갔더니 웬 아주머니가 '남자친구'는 어디 갔냐고 대뜸 묻습니다. 아주머니가 묻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노래 속 화자는 다음에 같이 오겠다고 마음을 끙끙 앓지요. 이에 공간에 물든 흔적을 지워내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여 집니다. 조금은 깨끗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잊혀진' 것이지만 사실 환하게 남아 '잊히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되려 그것은 세월 속에 살아나 대뜸 앓게 만들지요. 무지개처럼 환히 빛나며 그 당시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듯 누군가의 흔적이 조금씩 남겨진 채로 다시금 인연을 칠해나갑니다. 사람마다 모양이 다른 것은 아마 스쳐간 많은 이들의 흔적들이 마음 한편 묻어있기 때문일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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