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MALL

전체 글95

어버이날 시 모음 (성탄제, 못 위의 잠)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ㅡ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2023. 5. 7.
자화상, 윤동주 (성찰 시, 일제강점기 시)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하루를 보내며 어제, 오늘은 부끄러운 마음이 솟는 것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늘 말을 조심하라며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정작 나는 말실수를 해 아이에게 큰 상처를 남겼기 때문.. 2023. 5. 5.
침묵, 이해인 (언어 시, 사랑 시) 침묵 이해인 진정한 사랑의 말이 아닌 모든 말들은 뜻밖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많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말을 거듭할수록 명쾌한 해결보다는 더 답답하게 얽힐 때가 많음을 본다 소리로서의 사랑의 언어 못지않게 침묵으로서의 사랑의 언어 또한 필요하고 소중하다 말과 실천 뱉을 말을 주워 담으려면 얼마나 많은 말들이 필요할까요. 말을 속에 머금고 있으면 내가 말의 주인이 되지만, 말을 밖으로 뱉으면 말이 나의 주인이 된다고 합니다. 말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순간, 삶은 오해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지요. 이해인 수녀님은 말보다 침묵이 소중하다고 강조합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말씀하듯, 침묵도 언어의 한 갈래라 하겠습니다. 머레이비언의 법칙에 따르면 언어적 표현보다 비언어적 표현들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2023. 5. 2.
신경림 시 모음 (가난한 사랑 노래 외 2편)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2023. 4. 3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