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소개

주체로서의 삶은 가능한가?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by 짙음새 2023. 5. 15.
SMALL

놀이와 삶

 인지 통제 이론에 따르면 내적 동기가 유발된 상태에서 외적 보상이 주어질 경우 학습 동기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즉 동기는 자발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자발적인 삶이 바로 주체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모래사장에서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 아이에게 모래성을 쌓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행위이다. 여기에 모래성 몇 개를 쌓으면 얼마를 준다고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그 아이는 얼마 못 가서 그 행위를 멈출 것이다. 보상이 주어지는데도 그 아이의 동기는 감소한다. 
 리오타르(1924~1998)는 그의 저서(영화: 이론, 강연)에서 이러한 자발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던진다.

 

'켜진 성냥은 소비된다. 일하러 가기 전에 커피 물을 데우고자 당신이 성냥으로 불을 켠다면,

이 소비는 비생산적이지 않다. (...) 반면 아이가 보기 위해 쓸데없이 성냥을 켤 때

정점에 오르는 빛을, 작은 성냥개비의 소멸을, 쉬익 하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일을 하기란 어렵다. 특히 AI가 도입되고 나서는 효율이라는 명목 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서빙을 하는 일도, 커피를 타는 일도, 자동차를 모는 일도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리오타르는 이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생산적인 행위, 즉 효율에 묻혀 산다. 반면 아이들은 어떠한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그 자체가 갖는 의미를 맑은 눈으로 즐긴다. 동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수단화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다.

 요한 하위징아의 표현에 따르면 어떠한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면 놀이이며, '수단과 목적'이 불일치하면 노동이라고 말했다. 바닷가와 같은 탁 트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폭죽을 터뜨린다. 폭죽을 터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폭죽을 터뜨리는 것이 그 이유가 된다. 폭죽에 불을 붙이는 긴장감, 뻗어나가는 가늘고 쨍한 소리, 하늘에 띄우는 붉은 빛깔. 폭죽을 터뜨리는 행위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입시를 생각해보자. 입시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위 대학을 보내는 것이다. 즉 공부가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에 공부가 노동이 된다. 이러한 수단화의 문제는 동기 감소일 뿐만 아니라, 공부로부터 학생이 소외되게 만든다. 강신주는 사랑에는 수고, 즉 일이 들어간다고 말하기에 일이라는 것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화에 따라서 인간이 일에서 소외되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 퍽 안타깝게 느껴진다. 공부는 공부 자체에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한스도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쓸모없는 물건은 없애야 한다. 정말이지 이 모든 일들은 이미 오래전에 다 끝나버린 것이었다.

 

 한스는 신학교를 위해 공부하는 순간부터 놀이와는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 놀이와 멀어진 삶이란 바로 동심을 잃는다는 것. 삶을 수단화시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한 아이의 동심과 순수한 내면의 세계를 잘라내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어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에게 언제 놀아보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싶다.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된 삶과 그 극복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상대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의 괴리를 자주 경험하곤 한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고 물으면 '나다운 게 뭔데?'라는 물음으로 되갚는 드라마 대사는 수도 없이 봐왔다.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 에크리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자아의 불일치를 겪게 된다.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교 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레 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학교에서 교장과 선생은 한스에게 욕망을 내비친다. '착한 아이,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 학교 시스템을 수용하는 아이'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심지어 교장은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된다'라고 말하며 사회 시스템을 상징하는 수레의 비유로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기까지 한다. 한스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 잘리고, 깎이고, 갈린다. 그러면서 그들이 원하는 아주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생산되는 것이다.

  우리들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자율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타인의 욕망이 우리에게 투영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타인은 늘 오늘을 담보로 미래를 이야기한다. '내일 해', '다음에'라고 말하며 말이다. 현재의 나를 계속해서 희생시킨다. 무엇이라도 있는 듯 내일을 위해 힘쓰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 놀음이라는 것은 금방 들통난다. 대학교를 들어가면 취직하라고, 취직을 하면 결혼하라고, 결혼하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라고, 아이가 크면 여행도 다니고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가 컸을 때는 이미 여행을 다니기에 체력이 달리게 된다. 즉 내일이라는 허상으로 타인은 우리에게 욕망을 정당화시키나,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떳떳하게 찾아온 오늘을 통해서 말이다.

 삶에 있어 카르페디엠이라는 명령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고 힘있는 것이다. 강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똑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강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같은 강물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김선우 시인이 당신의 시에서 '오늘의 태양, 하루라는 짐승'이라고 오늘을 표현한 것도 오늘 하루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지 않을까?

 동양에서는 무상을 이야기한다. 무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하며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강신주의 표현에 따르면 사라지는 것들 주위에서 떠날 수 없다. 벚나무를 핀 풍경을 보고, 우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볼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벚나무의 벚꽃은 매일 그렇게 피어있지 않는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떠나지 못한다. 내 부모님의 피부에 주름살이 생겼다. 부모님께서 변화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먹먹한 듯 느껴졌다. 떠나기 어려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소중하다. 오늘도 새로운 오늘이고, 다시 올 수 없는 오늘이다. 오늘 읽는 시와 내일 읽는 시는 다르다. 오늘은 오늘로써 끝이다. 대상화된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노력은 늘 오늘을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네가 무엇에 의지하든 그것이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고 말한다. 지금 하는 행위는 똑같이 반복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오늘 했던 것이 영원히 같은 모양으로 반복된다면,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가? 순간의 영원성은 그토록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오늘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한스는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죽은 존재였다. 그는 오늘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오늘을 살자. 영원한 순간으로서의 오늘. 타인의 거짓된 약속을 간파하고 오늘에 흠뻑 잠겨 살아내자.

 

 

 

딴 이름이 되어 주세요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오로지 사랑만을 주제로 쓴 비극 작품이 바로 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하지만 이 비극에서는 비극의 침울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

kowriter30.com

 

 

그 많은 피드 속 나는 왜 우울한가 ? - 고독한 군중

나는 왜 고독한가? “선생님 인스타 하세요?” 한 학생이 내게 물었다. 인스타그램은 우리네 삶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매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매 순간 말이

kowriter30.com

 

 

현재를 즐기는 법 - 죽은 시인의 사회

교육이란 무엇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아이비리그 진학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자신 있게 행동하고 말하는

kowriter30.com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