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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스며든 적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현대 비판시)

by 짙음새 2023.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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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분열하고 명멸해왔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2008년 봄, 심보선

 

서평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유머로 빚어진 아이러니의 세계이다. 자잘한 일상 속으로 거대 담론들이 비집고 들어오고, 심각한 허풍과 과장 속에 누추하고 슬픈 삶의 한 단면이 아프게 생의 절실한 무게를 환기시킨다. 보잘것없다고 짐짓 너스레를 떠는 화자의 유머 속에는 이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숨겨져 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독특한 비유의 공간 속에 현실주의자의 차가운 꿈을 심어놓는다.

 

인상적인 시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나는 불만 세력으로부터 서둘러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대들은 나의 영원한 동지로 남으리

우리가 설령 다른 색깔의 눈물을 흘린다 한들

굳게 깍지 꼈던 두 손이 침착하게 풀린다

좋은 징조일까?

그러나 기원을 애원으로 바꾸진 말자

붙잡고 싶은 바짓가랑이들일랑 모두 불태우자

깃발, 조국, 사창가, 유년의 골목길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

지나가던 여우가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있는

너 또한 하찮아지지 않겠니?

지금은 원근을 무시하고 지천으로 꽃 퓨ㅣ는 봄날

그렇구나, 저 멀리 까마득한데

벚꽃은 눈 시리게 아름답구나

여우야, 나는 이제 지식을 버리고

뚜렷한 흥분과 우울을 취하련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저 꽃은 네가 벚꽃이라 믿었던 그 슬픈 꽃일까?

알 수 없다, 알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나가던 여우는 지나가버렸다

여기서부터 진실까지는 아득히 멀다

그것이 발정기처럼 뚜렷해질 때까지 나는 가야한다

가난과 허기는 또 다른 일이고

 

인상적인 구절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ᄄᅠᆯ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노선을 잃었다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둘 다

 

멸망하는 세계가 나보다 명랑하다

휴일과 섹스는 빼고

-미망 Bus

 

달이 지는 곳에 이상한 신화가 떠돈다. 해가 뜨는 곳에서도 그러하다. 어린아이들이 7일간 세계를 창조하고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내 세계 도처에는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들이 술집, 식당, 도서관, 학교 등의 입구들로 위장하고 큰 입을 으아아, 벌리고 있다. 그 미로 속에는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바텐더, 주방장, 사서, 교사 등으로 위장하고 큰 입을 으아아, 벌리고 살고 있다.

-아이의 신화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

-먼지 혹은 폐허

 

 

스며든 적들

 

 몇 년 전 표백(장강명, 한겨레 출판사)을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책을 꿰뚫는 핵심적인 질문은 ‘부조리한 사회 체제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생각합니다. 한창 모순된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 차오르던 시기였기에 이런 고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지요. 책에서는 그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야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시스템의 희생자가 되기 때문이라며 말입니다.

 허윤진은 해설에서 ‘싸워야 할 적이 선명하게 보이던 시대에 사람들은 차라리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싸워야 할 적이 있다면 이를테면 독재 따위의 선명한 부조리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적이 잘 보이지 않지요. 자본은 그렇게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에게 스며들어 있는 자본은 서로를 다투게 하지요. 그런 다툼은 ‘너가 열심히 살지 않았잖아.’라는 비난의 언어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싸워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난민 문제, 사회적 차별 등 그 모든 근원을 보면 자본의 흐름과 연관이 있지요.

 한국 사회가 이전에 비해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지금, 개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타인보다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 시에서는 ‘이런 시대에 혁명은 가능한가?’라고 묻습니다. 그 대답은 조금 차갑습니다. 시집에서는 혁명의 확실성을 믿느니 불확실한 일기예보를 믿겠다고 단언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군부 독재와 다르게 자본주의 독재는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지요. 다만 그 과정에서 경제적 약자들은 누구와 싸워야 되는지도 모르고 전쟁에 내몰리게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잔인한 현실에 놓일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였을까요? 시스템이라는 폭력 속에서 스스로 등불을 켜고 살아갈 존재로서, 주체로서 힘을 충분히 키웠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몸만 커버린 어린 어른은 상실의 슬픔에 몸을 맡기고 끝없이 차오르는 슬픔의 에너지를 이기지 못합니다. 상실함으로써 어른이 된 우리들. 그러나 규칙적인 노동의 틈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인 슬픔의 에너지는 공적 문서인 서류에 스며들죠. 슬픔의 힘으로,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사직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심보선 시집의 서평에서 담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끝나는 시집은 아니라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이후 시에서는 사랑에 대한 내용을 살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이 없다면 인간 개개인은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미물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사랑의 지속과 단절을 경험하면서 무한성과 유한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은 신비가로 변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가요. 무엇이든 다 내어주려는 마음으로 헌신합니다. 그 어리석은 몰입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지요. 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수난을 겪으면서 사람은 오히려 열락을 맛봅니다.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요? 처음 물었던 질문인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될까요? 분명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은 존재가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시화하지 못하는 이 단단한 시스템. 우리는 이 단단한 자본주의, 시스템 앞에서 그저 암울한 존재로만 남아야 하는 것일까요? 체념으로 하루를 빌어먹고 사는 존재로, 희열과 멀어진 객체화 된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유머와 아이러니로’ 빚어진 심보선의 시들이 현실을 여실히 잘 보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들을 따라가다보면 절망 속에서 움트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할 수 있겠다는 묘한 기대감이 부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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