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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표정 2, 청년과 함께 이 저녁)

by 짙음새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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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며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 그러나 킥킥 당신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 지성 시인선 118)

 

 


 저는 허수경의 시들을 좋아합니다. 왜 그런지 곰곰이 고민해 보니, 표현에 절제가 있는 듯해서 그렇습니다. 그녀의 시에는 감정 잘 요리한 맛깔난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 슬프다는 표현이 직설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그 감정을 절절히 느끼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화자에게 얼마나 확장되어 있는지 느껴집니다. 이 시를 읽다보니 윌리엄 스탠리 머윈의 시 하나가 떠오릅니다. '당신의 부재가 나를 관통하였다 / 마치 바늘을 관통한 실처럼 /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 실 색깔로 꿰매어진다'. 당신이란 부재함으로서 존재하는 듯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지요. 지워내려 할수록 더욱 다른 기억들에 전이되어 스스로를 아프게 합니다.

 허수경 시인은 그렇다고 '슬프다'라는 표현을 대놓고 쓰지 않습니다. 대신 '킥킥'이라 말할 뿐이지요. 허수경은 '악기만 남고 주법은 소실되어 버린 공후를 본다. 본만 남고 용은 사멸되어 버린 악기'라는 표현을 합니다. 킥킥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악기 주법이 소실되어 버린 공후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악기. 그 상황 자체가 주는 역설이 슬픔을 더욱 절절히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모두 허수경의 갖는 힘입니다.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내 맘대로 하려는 데에서 그 슬픔이 비롯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이중적인 감정. 내 맘대로 하려는 데서 슬픔이 비롯됨을 알면서도, 괴로워하고 있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입니다.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적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한 사람이 한 사랑을 스칠 때

한 사랑이 한 사람을 흔들고 갈 때

터진 곳 꿰맨 자리가 아무리 순해도 속으로

상처는 해마다 겉잎과 속잎을 번갈아 내며

울울한 나무 그들이 될 만큼

깊이 아팠는데요

 

-「청년과 함께 이 저녁

 

 

저 아가씰라도 자본이 소유해 낼 수 있는 꿈을 가졌으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무표정을 새로 시작하려는 것들이 끊임없이 목숨을 받고 또 받고 있는 걸까

-「표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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