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잘 있습니다』이병률 (사람, 사람의 재료)
첫 번째 근무했던 학교에는 조그만 산책로가 있었습니다.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었고, 그 주위를 보도블록으로 둘렀는데 초등학교 운동장 만했지요. 저도 가끔 학교 일로 속 시끄러울 때 선생님들과 걷곤 했습니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어떤 비밀이라도 품어줄 것 같아 그런지, 아이들은 저마다 보드라운 연애 이야기 하나쯤은 꺼내 놓고 있었지요. 그곳에 한 정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곳에서 시 구절 나누기를 했었지요.
"이거 내가 산 시집인데, 아무거나 하나 골라봐라 얘들아. 그리고 마음에 드는 구절 몇 소절 낭송해보재이"
그렇게 시를 낭송했지요. 그중 이병률의 '사람'이라는 시도 있었습니다. 그때 이병률 시인의 시를 알게 되었지요. 그 순간부터 이병률은 아이들과 제게 낭만을 선물해 준 시인이었습니다.
'사람'이라는 시는 몇 번을 곱씹게 하는 시였습니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사람」 중)'. 그때에는 사람이 선인장이 된다고 믿었는데요. 지금은 선인장이 사람이 된다고도 느껴집니다. 이렇게 뒤집어도 의미가 절절한 것은 시인이 사용한 비유가 힘이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두 대상 간의 끌어당김이 비유라고 한다면, 이 시에서는 접붙이는 정도로 친근한 힘을 냅니다.
이러한 힘은 섬세한 감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병률 시인의 시에서는 그런 섬세함이 자주 나타나 좋습니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사람의 재료」 중)'.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있나요. 증오는 빠르고, 사랑은 느립니다. 기계는 빠르고, 사람은 느립니다. 돈은 빠르고, 시는 느립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은 시인처럼 삶을 느리게 볼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하겠습니다.
'여기'라는 말에 홀렸으며
'그곳'이라는 말을 참으며 살았으니
-「노년」 중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청춘의 기습」 중
깊은 밤 자리에 누워
나는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면
조금은 알 것 같은 기운이
가슴 한가운데 맺히는 것이다
-「밤의 골짜기는 무엇으로 채워지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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